CoC 7th 시나리오 < 모든 거만한 것들의 왕이 여기에 있다 > 의 전반적인 내용 및 엔딩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https://youtu.be/9-6tRLmyWSA?si=U-WaLAf5EbgFQjsH
언제부턴가 밤이 무섭지 않았다.
화륜강은 범죄의 요람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눈 깜박할 새 귀가 잘리고, 한숨 내뱉기 전에 손이 잘리는 곳. 자물쇠랍시고 달아둔 것은 녹슨 칼로 내리치기만 하면 끊어지는 것이 당연한 곳이었기에, 모두가 깊이 잠들지 못하고 언제나 칼을 쥐고 다니는 곳. 그런 곳의 밤은 추악함의 온상이나 다름없었으므로, 짐작하건대, 사이노 역시 화륜의 밤을 무서워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는 어리고, 나약했으며, 성채에 사는 이들과 다르게 유약한 면이 있었으므로.
"사이노."
"……."
"… 울지 마, 사이노."
그러니까 이건, 전부 제 유약하고 겁많은 성정 탓이다. 사이노는 남자의 피투성이 몸을 끌어안은 채 소리 내 펑펑 울었다.
우는 사람보다 알하이탐이 더 당황해 어쩔 줄을 몰라 할 정도로 흐느낀 탓에 집에 돌아오고 나서는 일주일을 꼬박 앓았다. 어릴 때도 -사이노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안 앓았다던 열병을 이제 와서 앓는 건지 피도 닦아내지 못하고 침대에 고꾸라져서는, 일주일 내내 열이 펄펄 끓으면서 헛소리를 마구 해댔단다. 지쳐 잠든 알하이탐을 힐끗 본 옆집 이웃이 하는 말로는 그랬다.
이상한 일이다. 사이노는 화륜에서 지낸 삼 년간 잔병치레 한 번을 앓은 적이 없었으나 잠들면서도 제 손을 놓지 않은 알하이탐은 아프지 말라며 자꾸 중얼거렸다. 그러면 사이노는 그냥, 저보다 반절하고 조금 더 큰 손을 가만가만 토닥이면서 나는 괜찮노라고 속삭이는 것이다. 그럼 미약하게 떨리던 것이 잦아들고 호흡도 정갈해진다. 사이노가 일어나자 이번엔 알하이탐이 앓아누웠다. 그들은 그렇게 약 이 주 정도를 불안한 평온 속에서 보냈다.
"… 사이노?"
"물 마셔. 목소리가 다 갈라졌어."
"…… 침대가 좁아."
평소엔 어떻게 대답했더라. 투덜거렸던가, 면박을 주었던가,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닌 반응을 보였던가. '평소'라는 개념이 지나치게 생소한 탓에 사이노는 입을 다물었다. 걱정시키지 않으려면 평소와 같은 반응을 보여야 할 텐데 그게 무엇이었는지 혼란스러웠다. 대답을 미루고 있자 알하이탐이 맞잡고 있던 손에 미약하게 힘을 주었다. 저보다 반절하고 조금 더 큰 손이 완전히 제 손을 덮자, 침대에 등을 기대고 바닥에 앉은 사이노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머뭇거리던 시선이 올곧게 알하이탐을 향하자 그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 도망갈까, 사이노."
그러나 그 방에 있던 모두가 이루어질 수 없는 소원임을 알고 있었다.
도망가려던 채무자가 잡혀 귀가 잘렸다, 월세를 내지 않고 도망간 임대인이 화륜강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메이메이의 도박장에서 밑천까지 털린 사람이 도망치다가 잡혀 종신계약을 맺었다……. 하루 걸러 들리는 소리가 그런 것이었는데, 화륜강의 사람들에게 있어 도망이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고, 사이노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니었었다.
"도망갈까."
"… 어디로?"
"글쎄, 어디든 상관없지 않겠어. 이런 곳만 아니면 괜찮을 것 같은데."
"평생 강을 안 보고 살 수는 없어, 사이노."
"화륜만 아니면 돼. 지긋지긋해, 여기는."
사이노는 고개를 돌렸다. 알하이탐의 시선은 사이노의 뺨에 머물다가, 곧 눈꺼풀 뒤로 사라졌다. 맞잡고 있던 손의 힘이 풀린 것 같단 느낌이 들었으나, 그 누구도 다시 손을 맞잡지 않았다.
알하이탐이 언제까지고 사이노의 집에 머물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나, 사이노도 알하이탐도 적극적으로 그 집에서 나가려 하지 않았으므로 겨우 5평이 될까 말까 한 집에는 건장한 성인 남성과 소년 한 명이 살기 시작했다. 사이노는 사업장을 다시 열었다. 몇 주 전에 아이가 아프다며 웃돈을 얹어 감기약을 사 간 여자가 보이지 않아 걱정했다며 흐리게 웃고는 그에게 조금 물러진 사과를 쥐여주었다. 아이들이 안 먹는다고도 했다. 사이노는 문득, 이 모든 호의마저도 알하이탐이 계획했을까 고민했다. 그리고 털어냈다. 이런 사소하고 다정한 호의마저 계획하기에 그는 너무 메말라 있었다. 몇 년 동안 애정도 모르고 살아온 사내지 않았나. 제게 보여준 애정이 전 재산이었던 남자가 계획하기엔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애정이었다. 사이노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여자는 주름진 낯으로 말갛게 웃으며 따라 고개를 숙이곤 바쁜 걸음으로 골목 깊숙이 들어가 사라졌다.
사이노의 사업장에서는 화륜강이 보였다. 해가 저물기 한 시간도 더 전부터 화륜 강에 떠다니는 나룻배들은 붉고 노란 등을 내걸고는 소위 고위급 거물들을 호객하느라 목청을 높였다. 거물들은 천박한 돈을 덕지덕지 바른 귀한 비단옷을 입고는 뱃사공의 손을 잡고 배에 올라 다른 곳으로 향했다. 사이노는 갈 일도, 갈 수도 없는 곳이었다. 그들은 동쪽에서 어슴푸레한 불빛이 걷힐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사이노는 허탕 친 뱃사공들이 배 위에서 넋두리하는 소리를 들으며 사업장의 셔터를 내려 자물쇠를 채웠다. 일주일 넘게 자리에 나타나지 않은 마약상은 아무도 믿지 않는 법이었다. 상비약을 근근이 팔아 삶을 이어가기엔 수입이 빠듯했다. 사이노는 후드를 푹 눌러썼다.
오후에 나가 새벽에 들어오는 패턴이 두세 번 반복되자 알하이탐은 아예 가재도구를 바리바리 싸 들고 와서는(그 몸에서 그만한 짐을 들만한 근력이 나오는지조차 의문이었다) 카운터 뒤쪽 탕비실에 자리를 틀었다. 사이노는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냐고 따지려 들려다가, 아주 길게 한숨을 내쉬고 탕비실을 나갔다. 불면증 증세인지 과수면 증세인지 돌팔이 약사가 알 수 있는 것이 없어 저 치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란 말이 옳았다.
사이노는 사람이 오지 않는 약방의 카운터에 앉아 하릴없이 시간을 죽이다, 어느 날은 문을 닫고 성채 바깥까지 나갔다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알하이탐은 괜히 사이노의 손을 잡은 채 몸을 웅크렸다. 소매에 묻은 풀빛의 향이 화륜강에선 맡을 수 없는 것이라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고, 사이노는 막연히 생각했다. 아주 오래 살아온 자라면 화륜강 바깥에 무엇이 있는지, 거기서 무슨 향이 나는지 정도는 알 것이라고, 제 소매에 묻은 향이 그 오래된 향수를 자극한 거라고……. 사이노는 그다음 날부터 외출하고 돌아오면 꼭 옷을 갈아입고 탕비실로 들어갔다. 알하이탐은 내심 아쉬워하는 눈치였으나 무어라 말을 얹지 않았다.
집을 아예 내놓고 약방에서 머물기 시작하자 알하이탐은 이불을 뒤집어쓴 채 불현듯 "내 몫의 식비까지 계산할 필요는 없어."라는 말을 내뱉었다. 장부를 정리하던 사이노는 느리게 눈을 깜박거리다 "그럼 네 재산 내놔. 내가 쓰게."라고 대답했고, 알하이탐은 그제야 이불 속에서 비척비척 일어나 탕비실 바깥으로 나갔다. 반나절 만에 돌아온 치의 품에 안긴 작은 상자엔 통장, 집문서, 현금 다발, 마약 봉지 따위가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이게 뭐야."
"내 전 재산."
"네 책은."
"… 생존에 불필요하잖아. 내일 고물상에 내다 팔 거야."
"가지고 와, 알하이탐. 네겐 필요하잖아."
"……."
"알하이탐?"
"불필요해."
"고집 안 부리는 게 좋을 텐데."
다음 날 알하이탐은 손에 꽉 차지도 않는 지폐 다발을 사이노에게 내밀었다.
알하이탐의 지식에 대한 가치는 고작 그 정도밖에 안 되던 거였을까. 쌀쌀한 공기가 사이노의 손안에 머물다 빠져나갔다. 흰색 종이띠로 고정도 안 해둔, 사이노의 손안에 반절도 차지 못하던…. 3년간 보아온 알하이탐은 언제나 덤덤했지만 제가 아는 지식을 이야기할 땐 그나마 생기가 돌던 사람이었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유일하게 생기를 돌려주는 것을 금액으로 환산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고작 5위안짜리 지폐 열 장으로는 어림도 없는…. 사이노는 불현듯 고개를 치켜들었다. 푸른색 반소매 정복을 입은 순경이 펜 끝으로 머리를 긁고 있었다.
"어, 그러니까, 사이노?"
"아, 네. 제가 사이노입니다."
"유류품 받으러 오신 거 맞죠? 그… 청련 몰살 사건의 피해자시라고."
"… 일단 담당 형사님께는 그렇게 말씀드렸는데."
"예, 뭐. 가해자로 몰릴 일도 없고… 이게 재판까지 가진 않을 거고, 가해자가 누구인지 특정도 안 되어서 아마 증거 불충분으로 사건이 종결될 거에요. 이건 그 집에서 가져온 증거물들."
순경이 테이블 위로 상자를 올려두었다. 피에 젖어 몇 개는 표지를 알아볼 수 없었고(아마 내용도 알아볼 수 없을 것이다) 그나마 멀쩡한 것은 사이노도 알 법한 브랜드의 문장이 겉 포장에 찍혀있는 상자였다. 시선이 닿은 것을 본 순경이 신발이라며 설명을 덧붙였다.
"나이키 신발이던데? 어린아이용."
"… 그렇습니까."
"그으, 책 같은 건 일단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복원을 해두긴 했는데… 경찰서 근처에 작은 책방이 있는데, 거기서 같은 책을 살 수 있을 거예요. 목록을 받아두긴 해서, 그."
"아, 네, 감사합니다……."
"아아, 맞다. 보조금도. 잠깐만 기다려요."
순경은 바쁘게 카운터 너머로 사라지더니 흰 봉투를 들고 돌아왔다. 얼핏 보기에도 꽤 두꺼운 양이었다. 단순히 사건 피해자에게 주어지는 보조금이라기엔 양이 과했다. 순경이 멋쩍게 웃으며 사이노의 품에 봉투를 밀어 넣었다.
"얼른 가요."
"아니, 그래도,"
"몸이 안 좋을 거 아냐. 그걸로 병원도 가고 새 옷도 사고, 맛있는 것도 먹어요. 그래도 돼."
그는 입을 꾹 다물었다. 몸이 안 좋은 건 자신이 아니었다. 아픈 건 알하이탐이 더 그랬다. 그 치는 심장이 꿰뚫려도 병원을 가지 않으려 했고 옷도 끝단이 너덜너덜해진 걸 잘만 입고 다녔다. 그러면서도 제게 입히는 것이라곤 성채에서 그나마 깔끔하고 멀쩡한 것만 입혀주지 않았던가. 사이노는 한참 말이 없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순경이 말갛게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사이노는 책방에 들러 순경이 적어준 책을 전부 구매했다. 일부는 피가 번져도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아 구매하지 않았지만, 목록과 사이노가 들고 있는 상자를 번갈아보던 책방 주인은 헌책이라도 괜찮으면 가져가라며 공짜로 책을 얹어주었다. 고물상에 가 웃돈을 주고 알하이탐이 팔아치운 책을 수레 채 사들여 유류품까지 억지로 쌓아 올리니 달이 중천이었다. 사이노는 낑낑대며 붉고 노란 등 사이를 가로질러 수레를 끌었다. 셔터를 내려놓고 오긴 했으나 그 고집쟁이는 기어이 돈을 조금이라도 더 벌어야 하지 않겠냐며 문을 멋대로 열었을 것이 분명했다. 멀리서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났다. 화륜강 바깥의 도시에서는 오늘이 명절일지도 모른다. 아른거리는 빛이 사이노의 낯 위로 색색의 그림자를 드리웠다가 사라졌다.
"사이노."
"…… 알하이탐."
"이게 다 뭐야, 오늘 일이 있다고…."
"알하이탐."
표정이 불빛에 흐려져 보이지 않았다. 사이노는 잡고 있던 수레의 손잡이를 놓았다. 돌바닥 위로 쇠막대가 부딪히는 소리가 불꽃이 터지는 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맞지 않는 신발을 구겨 신은 탓에 발뒤꿈치가 온통 까져 쓰라렸다.
"도망가자, 알하이탐."
"사이노."
"어디든 좋아, 나는 그냥 네가… 이런 곳 말고, 해가 잘 드는 곳에서 책을 읽었으면 좋겠어. 이런 곳에 오래 있지 말고, 너랑 잘 어울리는 곳에서, ……."
"사이노, 울지 마, 왜 울어…."
"도망가자, 알하이탐. 화륜은 지긋지긋하잖아…."
사이노는 알하이탐을 세게 끌어안았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손이 뒤이어 느릿느릿하게 그의 등을 감싸 안았다. 어디든 좋았다, 그저 이 다정하고 바보 같은 치에게 무어라도 해주고 싶었다. 제게 돌아온 호의가 온통 알하이탐이 받았어야만 할 것 같아서, 그래서 그랬다. 그에게 풀빛의 향을 맡게 해주고 싶어서, 그늘지고 축축한 화륜강보단 볕이 잘 드는 꽃밭이 더 좋을 것 같아서……. 제게 준 호의의 배를 돌려주고 싶어서. 밤을 무섭지 않게 만들어주어서. 사이노는 그를 조금 더 끌어안았다. 심장 소리가 불꽃 소리가 뒤섞여 엉망으로 흔들렸으나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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